“흡연과 폐암 발병의 상관관계를 밝힐 수가 없다” 법원은 다시 한 번 담배회사의 손을 들어주었다. 어차피 질 수밖에 없을 싸움임을 잘 알았더라도 막상 결과를 받아든 이들은 허망했을 것이다. 이미 고인이 된 이들과 죽음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는 이들. 누구도 그들에게 담배를 피워야만 한다며 강요치는 않았을 것이다. 고로 죽음이라는 결과도 온전히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 판단이 쉽지가 않다. 그럼에도 흡연이 건강에 결코 좋지 않다는 점만큼은 사실 같다. 최근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는 공익광고는 정부가 이점만은 인정했음을 뜻한다. 각종 암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광고는 흡연의 유해성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러나 이 유치한 광고가 얼마나 효과를 거두었을지는 알 길이 없다. 정부 또한 광고를 만들긴 했지만 담배 자체가 사라지길 바라진 않을 것이다. 국민의 건강을 위한다는 수식어와 함께 담뱃값을 올렸고, 그 결과 적잖이 국고를 불릴 수 있었을 테니 말이다. 흡연자들에겐 필수품일 담배를 역사가 긴 만큼 하루아침에 미개인의 기호품으로 취급할 순 없는 노릇이다. 언제 우리나라에 담배가 도입됐을 지는 이 책을 통해서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막연히 유럽이나 미국을 떠올렸던 독자들이라면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유럽인들의 관점에 기대었을 때) 신대륙의 힘이 막강했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저자는 스스로를 마야인이라고 상상해볼 것을 주문하여 책의 서문을 열었다. 갑작스레 사라진 마야인들은 존재할 때조차도 특유의 신비감을 맘껏 뽐냈다. 그들은 과학의 힘만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정교함을 이 세상에 남기고 떠났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담배였다. 오늘날 사람들이 피는 형태의 담배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기를 빨아들이고 내뱉는 방식만은 오늘날의 담배와 아주 흡사했을 것 같다. 오늘날 사람들은 스트레스 해소의 수단으로 담배를 피운다. 간혹 사교성 향상을 위해 담배를 피우는 이들도 존재한다. 술 한 잔에 담배 한 모금 뻐끔이며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오가지 않으나 사회생활이 필수라 할 수 있는 각종 정보를 주고받는 일, 얼마든지 상상가능하지 않은지. 그런데 마야인들에게 흡연은 그 이상이었다. 그들의 흡연은 종교행위였다. 연기를 통해 그들은 신과 의사소통했으며, 미래에 대한 예언을 들었다. 그들이 담배에 부여한 의미는 오늘날 우리의 시선으로는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이었다. 어쩌면 그들 역시도 담배가 언제부터 그들의 역사에 등장했는지 모를 수도 있다. 저자는 BC 16000년 전부터 담배가 알려졌으며, 페루와 에콰도르 지역에선 BC 5000년에서 BC 3000년 사이에 담배를 재배했다고 적었다. 어찌 되었건 우리의 역사는 서양 중심으로 기술됐기에, 유럽에 담배가 도입되면서부터는 비교적 상세하게 담배에 대한 기록이 남았다. 흡연자가 아니어서 엽궐련과 지궐련, 씹는담배 사이의 차이를 정확히 인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유럽에 도입된 담배가 처음부터 각광을 받진 않았단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였다. 길에서 아무렇잖게 가래침을 뱉는 모습을 여러 차례 목격했고, 그들은 대개가 흡연자였다. 이러한 경험을 떠올리니 저자가 서술한 흡연자들의 비위생적인 모습이 쉬이 이해가 갔다. 특히 씹는담배로 인해 수염까지 누렇게 탈색이 된 모습을 상상하니 담배에 대한 저항심마저 들었다. 그러나 아직 위생을 논할 단계는 아니었다. 오히려 담배에 반하는 목소리를 냈다가는 무시당하기 일쑤였다. 열렬히 금연 운동을 펼쳤던 루시 페이지 개스턴은 불운한 삶을 살다 갔다. 제임스 1세는 담배를 옹호한 롤리를 제거하는데 성공했을진 몰라도 누구도 진지하게 그의 금연 철학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담배에 반하는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절대 다수는 담배에 무관심하거나 담배를 직접 피웠고, 서서히 담배에 중독 돼 갔다. 전쟁은 담배의 확산에 일종의 기회로 작용했다. 불안감을 호소하는 군인들에게 담배만큼 효과적인 보급품도 없어 보였다. 담배 회사들은 넘쳐나는 수요에 부응하고자 공격적으로 공급을 늘렸고, 그에 따라 노예들은 그리고 나중엔 노동자들이 열악하기 짝이 없는 조건에서 일해야만 했다. 공격적인 마케팅도 이 즈음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역시나 담배에 관한 반대의 목소리가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한건 의학이 충분히 발달한 후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이미 충분히 몸집을 부풀린 담배회사의 눈치를 봐 가며 이루어졌고, 담배 회사들은 머리를 굴려 필터를 삽입한 담배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그 또한 이미 기존의 독한 담배에 적응한 소비자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눈 가리고 아웅하는 수준의 성능을 보이는 필터를 삽입할 수밖에 없었지만. 점점 더 흡연자들이 마음껏 담배를 입에 물 수 있는 공간은 줄어드는 추세다. 그러나 2020년이나 2005년 즈음이 되어도 흡연자들이 도도 새처럼 멸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흡연자들 또한 흡연이 자신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그들이 두려운 건 흡연으로 인해 건강을 망치리라는 사실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은 담배 없는 세상, 그래서 스트레스의 해소를 위해 탈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고야 마는 걸 더 두려워할지도 모른다. 담배라도 피울 수 있으면 행운인 걸까. 어린 친구들조차도 삶을 버거워하다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잦은 요즘이다. 담배를 피움으로써 흡연자들이 얻을 수 있는 심리적인 무언가가 문득 부러워진다.
금 못지않게 값지고 금 못지않게 해로운 것!
담배와 관련된 모든 문화, 정치, 경제의 역사
오늘날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담뱃갑마다 경고 글이 인쇄되어 있고, 텔레비전을 틀면 각종 질환으로 고통받는 흡연자들의 끔찍한 모습이 끊임없이 등장하니 말이다. 그럼에도 올해 1월 정부가 담뱃값을 인상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크게 반발하며 담배를 사재기하여 편의점마다 동났던 것은 어찌 된 영문일까? 어째서 사람들은 건강의 위험을 무릅쓰고 한 갑에 2,000원이나 하는 세금을 내면서까지 여전히 담배를 찾는 것일까? 담배는 도대체 무슨 수로 인류를 이토록 단단히 사로잡을 수 있었을까?
학계 밖 저술로는 최초로 전미도서관협회 ‘최고의 책’으로 선정된 신들의 연기, 담배 는 메인 호를 기억하라 로 국내 독자들에게 소개된 적 있는 미국 저널리스트 에릭 번스의 대표작이다. 증류주, 책, 언론의 허위 보도 등 다양한 키워드로 미국 현대사의 이면에 묻힌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숨겨져 있던 진실을 파헤쳐온 에릭 번스가 이번에는 담배가 지나온 파란만장한 여정을 추적한다. 담배를 신이 내려준 선물로 추앙하며 제의와 질병 치료에 사용했던 1천5백 년 전의 마야 문명부터 담배가 영국의 아메리카 식민지 건설을 성공시킨 주역으로 활약하고 미국의 독립전쟁을 일으킨 불씨가 되었던 17∼18세기, 수많은 군인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었던 제1·2차 세계대전, 갑자기 모든 것을 잃고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을 위로해주었던 대공황 시기, 그리고 미국 보건위생국의 보고서를 통해 암 질환의 주범으로 공식 발표된 1964년에 이르기까지, 고대부터 현대를 망라하여 담배와 관련한 거의 모든 역사를 다루었다. 그 속에는 오랜 세월 인류와 동고동락했던 담배의 문화적·사회적·경제적 영향력이 오롯이 담겨 있다.
서론 : 신이 내려주신 선물 _009
1장 : 구세계의 몽상가들 _035
2장 : 담배의 적들 _077
3장 : 담배의 정치학 _117
4장 : 담배 대농장과 미국 독립 _145
5장 : 술과 담배는 사탄의 쌍둥이 _191
6장 : 엽궐련과 씹는담배 _205
7장 : 군인과 노동자의 담배, 지궐련 _251
8장 : 세계에서 가장 열정적인 금연 운동가 _275
9장 : 지궐련 산업과 광고 산업 _329
10장 : 담배 유해론과 필터 _371
11장 : 관 뚜껑에 박는 못 _421
에필로그 : 열 시의 사람들 _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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